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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기간
2024/01/02 → 2024/01/18
분류
문학
한 줄 요약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은 저주일까?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은 살아가기 위한 발버둥으로 외부의 구원을 바란다.
저자 및 출판사
정보라
평가
⭐️⭐️⭐️⭐️

01.02 화 ( p.1 ~ p.82 )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조그만 고통을 겪고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들을 극복한 사람들에게 교단이 주는 인정과 치하는 삶의 의미 혹은 그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보였다.
고통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이른바 삶을 느끼게 하는 증표다. 그렇기에 고통을 통제할 수 있는 세상에서 고통은 삶의 의미를 의식적으로 부여하는 약이 된다. 우울한 삶을 보내는 개인이 항우울제를 통해 버티듯이, 의미 없는 삶을 느끼는 개인은 통제 가능한 고통을 통해 활력을 부여할 수 있게 만든다. 역사적으로 고통을 피하려고 노력한 인간이 고통을 찾는 모순적인 세상이다.

01.04 목 ( p.82 ~ p.122 )

"약을 먹으면 아프지 않으니까, 아빠가 때려도 울지 않을 거예요. 약을 먹으면 저도 다른 집 아이들처럼 착한 아이가 될 수 있어요.”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를 보며, 삶의 어려움과 힘듦을 평가한다. 바꿔 말해,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세상에선 자신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느낄 수 없다. 고통에 무뎌지는 것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전자는 단단해지는 과정이며, 후자는 곫아가는 과정이다.

01.08 월 ( p.122 ~ p.139 )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엽은 생각했다. 잘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혹은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그다지 능숙하게 감당하지 못했다. … 욱의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엽은 욱이 외계인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욱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다른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끝없이 ‘나’라는 삶의 의미를 정의내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무리 깊게 생각해도 명쾌한 정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해소되지 않는 괴리감에 직면한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지 못하기에, 자신이 답하지 못한 해답을 대신 해소할 수 있는 맹목적 대상을 추구하게 된다.
자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요소가 해답이라고 믿는 행위는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자의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요소는 사유의 폭이 피상에 국한된다. 그렇기에 자신이 모르는 것은 그저 스스로의 부족함이 아니라고 자위 할 수 있다. 얼마나 편한 일인가? 작중에서 엽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욱은 삶의 의미를 자신을 괴롭힌 고통으로부터 발견한다.

01.11 목 ( p.139 ~ p.196 )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춰진 상태로 저에게 주어졌는데 이제 와서 믿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하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삶의 의미를 의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를 부정한 순간, 그 동안의 시간과 노력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밀려오는 허무함에서 가장 쉬운 선택은 의심을 멈추고, 맹신하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사유를 멈추지 말자

01.12 금 ( p.196 ~ p.226 )

고통은 신성하다. 고통 속에 구원이 있다. 오직 고통만이 인간성의 근원이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 가치에 의심을 갖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느끼는 대상을 만난 순간, 몰려오는 감정의 폭포는 판단의 기준을 바꿔버린다. ‘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가 아니라, ’대상‘이기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이에 맞춘다. 마치, 광신도가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지르는 것과 같이 말이다

01.15 월 ( p.226 ~ p.286 )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삶의 의미’라는 단어는 잔인하다. 삶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곧 자신이 살아갈 이유가 없고, 세상에서 ‘나’라는사람이 존재하면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함을 뜻한다. 이른바, ‘나’의 죽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고 싶다. 살아가고 싶은 자신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설령, 그 의미가 외부에 있고, 이성적 사고를 통해 도달하지 못한 요소일지라도 삶을 계속 해도 된다는 위안감을 얻는다. 작중 신도들에게 고통은 삶을 허락해 준 구원과도 같다.
갖지 못하면 죽어버리고, 그렇기에 집착하는 것, 이런 점에서 삶의 의미는 인간에게 저주가 아닐까?

01.17 수 ( p.286 ~ p.303 )

자신이 그 존재에게 의존하여 여전히 의미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태는 울었다. 자신이 인간이라서,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태는 절망하여 울었다.
삶의 의미를 외부의 대상에 의존한 순간부터 삶은 대상과 하나가 된다. 대상을 향한 집착과 헌신은 삶의 고양감을 높인다. 이러한 관계를 정의한다면, 봉사나 공생보다 기생에 가깝다. 기생 관계에선 숙주가 사라지면, 기생체도 죽음을 맞이한다. 마찬가지로, 삶의 의미외 목적을 부여해 준 대상이 사라진 순간부터 자신의 삶도 사라지게 된다.

01.18 목 ( p.303 ~ p.383 )

책 표지에는 ‘고통 받는 몸’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표지 아래쪽에는 출판사 이름 대신 ‘초월과 구원’이라고 찍혀 있었다.
자신의 삶에 의문을 품었다고 한들, 끝이 언제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 남기고 간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태와 경은 서로 상반대 되는 양상을 보였다. 태는 고통이 삶의 구원이 될 수 있는지에 의문을 품었지만, 인간의 형상을 벗어난 교주를 만난 직후에 의심을 버렸다. 그리고, 다시 고통의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경은 고통의 흔적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의심과 비판 속에서 도달한 결론이 타인의 눈에는 옳지 않다고 보일지라도, 자기 자신에겐 옳은 것이 된다. 태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우리의 눈에 틀리게 보일지라도, 자기 의심과 비판 속에서 도달한 결론을 존중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