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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관한 모든 것

기간
2024/07/22 → 2024/08/13
분류
인문학
사회과학
한 줄 요약
저자 및 출판사
평가

07.22 월 ( ~ 77 )

자살은 실존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주체의 자발적 죽음에서 구하고 발견하는 행동이다
개인적으로 자살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옳지 못한지에 대한 논리와 근거가 떠오르지 않는다. 자살을 반대하는 의견의 대다수 근거는 사회적 규범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 근거를 다르게 해석하면, ‘나’의 삶보다 사회적 규범을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이 아닌가? 이성적 판단 하에 더 이상 삶을 영위하기 싫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살이라는 주체적 선택을 내리는 경우에 사회는 어떠한 권리로 이를 막는 것일까? 주변에서 삶은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삶의 결정권자인 ‘나’가 이성적 판단 하에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때,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 자살이 주변 지인에게 아픔을 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나’보다 주변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어패가 아닌가?

07.23 화 ( ~ 113 )

결국은 죽음으로 사랑을 승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연인들은 무덤에서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상대방과 멀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선택할 만큼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보다 더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자살은 가장 높은 차원의 주체적 선택이다. 그렇기에 문학과 역사 속에서 자살은 숭고한 것으로 묘사된다. 분신 자살을 하는 수도승에게 거대한 신념을 느끼고, 먼저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며 자살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위대함을 느낀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자살을 택하는 자는 그저 이성적 판단을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였을까? 혹은, 극한의 이성적 판단을 통해 자살이 최고의 선택임을 결론 짓고 행동한 자일까?

07.24 수 ( ~ 150 )

항복은 다른 수십 만 명의 영웅적 행위를 더럽히는 짓이지. 이 세상의 비애로부터 해방되 어 영원한 명성을 얻을 수도 있었는데•·····.
인간의 대단하면서도 무서운 능력은 ‘나’라는 실존성을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부여한다는 것이다. 명예를 위해 자살하는 군인, 영원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동반 자살을 하는 여인,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 자살하는 종교인 등…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기꺼이 삶을 포기하는 자들이 세계 각지에서 항상 등장한다.
이들에게 있어 ‘나’의 실존성은 신체가 아니라 명예, 사랑, 이념 등 추상적 가치에 있다. 그렇기에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가치 요소가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자살을 택한다. 추상적 가치 없이 몸만 존재하는 ‘나‘는 살아 숨쉬는 존재가 아닌 셈이다.

07.26 금 ( ~ 165 )

그 보편적인 특징을 들자면 그것은 '희생적 자살이 갖는 이익을 들 수 있다. 즉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거나 상황이 변화되기를 원한다.
이념, 명예, 사랑 등 개인의 가치관을 지키거나 증명하기 위한 자살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다. 이와 다르게, 자신이 아닌 타인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한 자살도 존재한다. 이러한 유형의 자살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자신과 동일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집단의 이익은 곧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간접적으로 ’나‘를 위한 자살로 해석될 수 있다.
집단과 나의 일치성은 모두가 동일하지 않다. 가령 집단에서 세뇌 활동 등을 통해 일치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 혹은 집단에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자아정체성을 강하게 느끼는 자일수록, 일치성이 강하다. 뭐든간에,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살하는 사례는 인간이 만든 사회가 오히려 인간을 종속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07.30 화 ( ~ 181 )

개인의 자살은 대부분의 경우, 하나하나의 죽음에 확실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지만, 자살이 '조직적'으로 일어난 경우에는 사회 구성원 누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게 된다
자살의 의미를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인위적으로 자살에 부여할 수 있다. 여러 국가에서 카미카제, 일명 자살 폭탄은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본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선 자살 폭탄을 천황과 국가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 말하며, 신의 바람이란 의미로 ‘가미카제’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애초에 가미카제라는 이름, 그 자체만 봐도 국가가 자살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했음을 반증한다.
<미드소아>에선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일정 나이를 넘으면, 절벽에서 스스로 떨어져 자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외부인이 이를 기괴하게 여기는 반면, 마을에선 이를 축복하고 즐거워한다. 자살의 무게와 의미가 집단으로부터 부여되며, 개인은 이를 기꺼이 다른다는 모습이 무섭다.

07.31 수 ( ~ 211 )

역설적이게도 자살은 사회가 중요하고 안정되면 될수록 증가하고 정치적 위기나 전쟁 시가 되면 감소한다
자살엔 자아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필수로 요구된다. 지금의 삶에 의미가 없고, 삶을 영위할지라도 상황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해야지만 삶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때, 삶의 의미 유무 판단은 자신이 어떠한 부분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지를 먼저 알아야 가능하다.
작중에는 사회가 안정적일수록 자살 빈도가 증가한다고 말한다. 이는 안정된 사회일수록, 시선을 사회보다 나를 향해 돌리는 기회가 많아지며, 결과적으로 삶의 의미를 평가하는 시간이 증가한다.

08.01 목 ( ~ 226 )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은데다가 믿고 있던 것이 모두 무너져버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삶의 목적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대다수가 이를 찾지 못해 좌절하고, 결국 인생의 목적보다 하루의 소소한 행복으로 삶을 영위한다.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현실에 타협한 듯한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들의 눈엔 삶의 목적이 명확하고, 이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빛나 보인다.
모순적이게도 빛나 보이는 사람들이 삶을 더 쉽게 포기할 수 있다. 삶의 목적과 이유가 명확하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의미가 있고 없음을 명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믿고 있던 것이 무너져 버린 직후, 이들은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
나는 삶의 의미를 좌지우할 만큼, 믿고 있은 것이 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그런 건 없는 듯 하다. 그렇기에 믿음이 무너졌을 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08.06 화 ( ~ 260 )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늙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다가오기 전에 죽어버리는 것이다
지난 주 금요일, 친할아버지께서 별세하셨다. 할아버지께선 오랫동안 운동과 식단을 병행하며 건강을 챙기셨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치매과 골병이 심해졌고, 결국 거동과 말도 못 하는 상태로 요양원에 몇 년 동안 누워만 있었다. 안치실에서 놓인 차갑고 생기 없는 몸은 화장터에서 한 줌의 골분으로 변했다.
골분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인생을 열심히 살아도, 죽으면 한 줌의 골분이 될 뿐이다.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삶도, 거대한 재력으로 얻은 부유한 삶도, 하루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치는 삶도 모두 똑같다. 모든 삶의 끝은 한 줌의 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늙어서 정상적인 상태가 되지 못하면 삶을 끝내고 싶다고 부모님에게 말했다. 삶의 마지막이 한 줌의 재라면, 죽음을 피할 이유는 없다. 또한, 정상적인 상태로 하루를 보내지 못한다면, 굳이 죽음을 더 미룰 필요도 없다. 노년의 자살은 삶의 끝이 모두 똑같기에, 더 이상 남은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닐까?

08.12 월 ( ~ 423 )

나는 죽고 싶다. 이것은 적어도 가끔은 삶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이 존재 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살하는 모든 사람들 은 유죄이다.
인생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희망마저 없을 때, 삶은 치욕이고 죽음은 의무다 … 야만인들은 결코 생각해애지 못하는 자살을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들은 실천한다
의식적 자살을 행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가 그 만큼 명확했음을 반증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느낄 때, 자살을 행한다. 이때, 내가 지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가치가 있고 없음을 판단할 수 있다.
애초에 자신의 삶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모른다면, 자살은 선택지로 남을 수 없다. 반면, 삶의 의미가 있고 이를 더 이상 지킬 수 없음을 깨닫는다면 자살이란 선택지가 생긴다.
명확한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 죽음까지도 이어지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슬프면서도 부럽다. 나는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