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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간
2023/02/14 → 2023/03/03
분류
문학
한 줄 요약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
저자 및 출판사
룰루 밀러 / 곰 출판
평가
⭐️⭐️⭐️⭐️
브런치 서평
02.14 화 ( p.1 ~ p.24 )
혼란 속에서 질서를 추구하기. 이는 한 끝점에서 다른 끝점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끝없이 붙잡아도, 굽히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부럽다.
어제 엘런 머스크의 인터뷰를 릴스로 봤다. 그가 히어로라고 믿던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가능하지 못하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인터뷰이의 말. 눈에 눈물이 맺힌 모습을 보니 그 사람의 여정은 지독히도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가 없음을 느꼈다. 요즘 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23.02.15 수 ( p.25 ~ p.90 )
삶에 목적을 부여하기에 삶이 힘들어지는 모순적인 상황. 삶에 목적을 부여하는 행동은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목적“을 위해 ”나“가 존재하는게 아닐까? 목적이 있는 삶이든 혹은, 목적이 없는 삶이든 결국 어떤 게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다. 각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니깐
23.02.16 목 ( p.90 ~ p.121 )
니체는 이름이 주어져야 비로소 실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름이 있어야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걸까?
이름은 그 대상의 본질이 아니다. 그저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분류돼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이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고유의 대상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니깐. 본질이 아닌 독립성을 목적으로 하는 이름은 존재의 실존 기준이 되는가?
23.02.20 월 ( p.121 ~ p.160 )
꿈, 미션, 비전, 삶의 목표, 이 모든 건 남들보다 우월하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저 우월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리기 위해, 명분을 부여하며 이쁘게 포장한 게 아닐까? 요즘 들어, 내가 생각한 목표가 정말 순수한 목표, 그 자체만으로 존재 가능한 본질적인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든다.
23.02.21 화 ( p.160 ~ p.173 )
인간이란 존재는 가변적이며 모순적이다.자기 혐오를 가진 사람도 동시에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서로 동시에 갖기 힘들다고 생각한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게 인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정의하는 행동은 절대적 답이란 것, 자체가 없는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
23.02.22 수 ( p.174 ~ p.200 )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
자기확신은 자신을 나아가는 원료임과 동시에 자기를 파멸시키는 힘이 될 수도 있다.
23.02.27 월 ( p.200 ~ p.230 )
나라는 존재가 중요한 존재임을 판단하는 건 “나”가 아닌, 나를 둘러싼 “세계”다. 스스로가 중요하지 않다고 칭해도, 나를 원하는 존재가 있다면 나는 중요한 존재로 존재할 수 있다.
23.02.28 화 ( p.230 ~ p.254 )
이름은 대상을 존재하게 만듦과 동시에, 존재를 제한하는 낙인이다. 우리는 바다에 사는, 반짝이는 비늘이 붙은 물고기를 “어류”라고 칭한다. 하지만, 물고기의 생물학적 구조를 보면, 물고기는 모두 다양하다. 어떤 물고기는 소나 인간에 더 가깝기도 하다. 즉, 각각의 물고기는 생물학적으로 너무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 모두에게 “어류”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그 순간부터 각 물고기의 생물학적 특이성은 사라지고, 모두가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작중에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는 사실” 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는 책이 전달하고자 한 바를 관통한다. 누군가가 이름을 부여해 대상을 존재시켰다면, 그 대상의 삶은 이제 부여된 이름에 맞춰 살 수 밖에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름을 부여한 자는 그것을 기대하며, 이름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부여된 대상은 그 이름이 칭하는 정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의에서 벗어난 순간, 그 이름은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과”를 “빨갛고 씹으면 단 맛이 나는 과일”이라고 한다면, 사과가 빨간 색을 띄지 않는 순간부터 더 이상 사과로 칭할 수 없다.
23.02.28 화 ( p.255 ~ p.290 )
대상의 이름을 짓는 행위, 정의를 내리는 행위는 단 한 번으로 멈추면 안 된다. 부여된 이름이 고정된다면, 그 대상의 숨겨진 또 다른 본질을 볼 가능성을 영영 놓치게 된다.
그렇기에 이름은 가변적이다. 니체는 “이름이 부여되고 그 대상은 실존한다“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칭하는 실존은 인지 가능성 측면의 실존일 뿐, 본질적인 실존을 칭하지 않는다.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 이미 부여된 이름에 돌을 던지고, 오늘의 이름이 사실 그 대상의 본질적 이름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끝없이 대상의 이름을 정의하는 행동을 통해 우리는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과학을 정의하는 기준으로 반증 가능성 유무가 있음을 책에서 본 적이 았다. 결국 이름도 반증 가능성이 필요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