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9 월 ( ~ 58 )
엄마 새는 어째서 돌아오지 않나.
얼마나 멀리 있기에 아기 새가 죽어도 오지 못하나.
세상에 잠시 들렸다가 떠나간 존재가 얼마나 많은가? 갓 태어난 존재는 세상을 향해 여기에도 삶이 존재함을 목 놓아 외친다. 하지만, 어린 존재의 외침과 무관하게 세상은 그저 흘러간다. 오히려 거대한 흐름으로 작은 존재를 덮쳐버리고, 그렇게 하나의 존재가 사라진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09.10 화 ( 58 ~ 96 )
계속 무영과 가깝게 지내면 나 역시 그런 소문에 휩싸일 것만 같았다 … 나는 무영을 믿지 않았다. 분위기를 믿었다
개인은 연약하기에 분위기를 따른다. 들려오는 소문이 틀렸다고 말하지 못하고, 묵묵히 가만히 있는 이유도 동일하다. 집단 안에서 돌아다니는 소문을 믿어야만, 해당 집단의 구성원임을 인정 받을 수 있다.
소문을 따르는 자는 그렇지 않은 자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이미 그들은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알고 있으며,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 자를 볼 때마다 숨기고 싶은 진실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두려울 뿐이다.
09.20 금 ( 96 ~ 173 )
아이들은 많은 것을 단숨에 외우고 자세하게 기억한다.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스스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열심히 한다. 소용없다는 이유로 어른들이 더는 하지 않는 일들을 아이들은 한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 “해야 하는 일“이라고 배운 것은 주저 없이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소용 없다고 말하거나,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며 시도하길 주저했다. 해야 하는 일을 주저 없이 행하는 마음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게 슬프다. 어른이 아닌, 어린이가 되고 싶다.
09.23 월 ( 173 ~ 260 )
불행을 모으면서 안심하는 사람. 엄마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엄마는 내가 불행해야 안심할 것이다. 나의 행복을 의심하고 부정할 것이다. 네가 아직 모르는 게 있다고 말할 것이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할수록, 다른 사람도 불행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이 타인의 불행을 그토록 바라는 이유는 자신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행복한 사람이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불행한 사람은 오직 나 밖에 없다는 생각, 얼마나 외롭고 씁쓸한가?
타인의 불행을 엿보며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동시에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다.
09.24 화 ( 260 ~ 300 )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무수한 순간들. 그런 것들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한 사람의 인생이 바로 그것들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을 수만은 없고.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기억을 만들고, 동시에 잊는다. 유치원 짝궁의 이름, 초등학교 선생님의 성함은 잊혀졌고, 고등학교 동창의 이름, 대학생 교수님의 성함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기억은 존재의 유무를 결정 짓는다. 대상을 기억한다면 존재하는 것이고, 잊어버린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망각은 일방적인 폭력이다. 무엇인가를 잊어버려도 나에겐 별 다른 문제가 없다. 이와 다르게, 대상은 나의 시선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버렸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이 내 기억에서 일방적으로 잊혀져 사라졌을까?
씀이란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한 행동에 가깝다. 종이 노트나 핸드폰 메모장 등에 끄적인 글을 보면 잊혀져 가는 혹은, 잊혀진 무언가를 다시 떠오르게 된다. 존재를 위해 우리는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