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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기간
2023/07/10 → 2023/08/03
분류
인문학
문학
한 줄 요약
고통을 받아들이고, 함께 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저자 및 출판사
알베르 카뮈 / 열린책들
평가
⭐️⭐️⭐️⭐️
브런치 서평
07.10 월 (p.1 ~ p.24)
감정 및 윤리적 요소를 배제한 체 오직 논리적 사고만으로 삶의 가치와 이유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살은 타당한 선택지일까?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모든 삶의 이유와 가치가 타당하지 않다고 논리적으로 판단했을 때, 어떠한 선택을 하는 것이 타당한가? 나에게 의미 없는 삶을 어쩔 수 없이 이어가는 것? 아니면,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음을 받아들여 행동하는 것?
역사 속에서 논리적 사고 끝에 자살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감정선을 배제하고,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자들의 논리는 무엇일까?
07.11 화 ( p.24 ~ p.32 )
모순적으로 삶에 무기력이 느껴지는 순간, 삶에 대한 근본적 고찰이 시작된다. “왜 나는 무기력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지금 삶의 가치와 이유를 탐색한다. 탐색의 결과는 단 3가지 뿐이다. 다시 무의식적인 삶으로 돌아가거나, 나만의 삶에 의미를 발굴하거나, 자살을 맞이한다.
무기력함은 지금의 나를 우울하게 만들 수 있지만. 삶을 사유하기 만드는 시발점이다.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해선 기존의 나를 무너트려야 한다.
07.13 목 ( p.32 ~ p.58 )
우리가 “완전히 알고 있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령 “나”를 정의한다고 해보자. 이 때, 서로 다른 측면이 존재하며, 이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과정에 필연적인 모순이 발생한다. 흔히 쓰이는 “대상이 입체적이다”라는 표현이 이 모순을 대변하는데, 대상의 성질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음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성질의 입체성은 필연적이며, 단 하나로 정의 내리지 못할지라도 여러 측면에서의 정의를 내릴 수 있기에 “알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다만, 대상의 정의를 동시다발적으로 내릴 수 있다면, 몇 개의 정의를 말해야 ”완전히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가 부족한 정보로 인해 미처 내리지 못한 정의도 존재할 수 있다.
결국,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알베르 카뮈는 작중에 “부조리”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그의 부조리는 “우리가 아무리 알려고 노력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부조리를 인지하지만, 앎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않는다. 책의 제목, <시지프 신화>는 앎을 향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다. 끝나지 않음을 알지만, 계속 돌을 굴리는 시지프의 모습이 앎을 향한 우리의 모습 같지 않은가?
07.14 금 ( p.58 ~ p.68 )
“고통은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일임에도 말이다.” 삶에서 고통은 꼬리표처럼 따라온다. 자신의 역량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비예측적으로 찾아오기에 고통을 완전히 회피할 수 없다. 설령, 이번의 고통을 피했다고 한들, 다음에 찾아오는 고통을 피할 수 있단 보장은 없다. 그렇기에 고통을 피하는 법이 아닌,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감당 가능한 고통선을 점차 확장해가며, 이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
07.17 월 ( p.68 ~ p.78 )
“알고 싶은 욕망”과 “알 수 없는 세상”, 이 둘 사이의 모순은 우리를 좌절하게 만든다. 제 아무리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세상과 나 사이에 놓인 벽을 더 명확히 인지할 뿐이다. 알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원죄인가?
07.18 화 ( p.78 ~ p.88 )
부조리를 인지하는 순간, 삶의 한계를 느낌과 동시에 삶의 태동감도 느낄 수 있다. 부조리는 인지의 긴장감을 더함으로써 가림천을 걷어 세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만든다.
설령, 긴장된 인지를 통해 알게 된 존재론적 한계가 우리를 낙담시키더라도, 한계를 직면한 사람은 답을 찾을 것이다. 삶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절대적 답은 없으며, 각자에게 맞는 답이 존재할 뿐이다. 질문을 던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나만의 답을 찾지 않을까?
07.20 목 ( p.88 ~ p.107 )
자신과 세상 사이의 벽을 느끼는 순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2가지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과 회피하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이 갈림길에 직면했기에 살아가는 것, 이른바 삶에 대한 고집을 결심할 수 있다.
07.21 금 ( p.107 ~ p.119 )
“천재성, 즉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성이 자리한다.” 사회는 한계를 규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한계를 규정하는 건 옳지 않을까?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허용된 범위 안에서 더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다. 사고와 행동은 모두 현재의 상황을 인식하는 데 시작한다. 한계를 명확히 인식할수록, 더 나은 사고와 행동으로 이어진다.
07.24 월 ( p.119 ~ p.158 )
삶에서 고통은 필연적이다. 지금 나에게 찾아온 고통이 사라진다고 한들, 새로운 고통이 찾아온다. 고통에 대해 호소해도 변하는 건 없고, 고통은 그저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킨다.
고통은 삶의 옆을 위치하기에, 오히려 삶을 느끼게 만든다. 삶을 힘들게 만든 고통이 오히려 삶을 강하게 만드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고통이 가져오는 긴장감은 삶의 태동이며, 중압감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고통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삶이 완성된다.
07.26 수 ( p.158 ~ p.174 )
삶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피곤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과 목적에 질문을 끝없이 던지지만, 되돌아 오는 명쾌한 답은 없다. 스스로 딜레마를 선택하고, 사유는 끝없는 길을 걷는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길을 가는 건 인간의 숙명이지 않을까?
07.27 목 ( p.174 ~ p.185 )
부정하면서도 열광하는 것. 하지만 그게 삶이란 걸 알기에 우리는 모순을 받아들인다. 비록 이 모순을 처음 맞닥트릴 때,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며 허무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것이 삶임을 깨닫고 나아간다.
07.31 금 (p.185 ~ p.204)
근원적 모호함. 존재는 양면성, 모순을 지니기에 근원을 알아갈수록 모호할 수 밖에 없다. 모순적이게도 근원의 모허함은 그 대상의 울림과 의미를 부여한다. 근원을 알았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는 것,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의미 있는 것임을 뜻하는 게 아닐까?
07.31 월 ( p.204 ~ p.212 )
풍요로움, 행복함, 비참함, 절망감과 같은 감정은 삶의 가치를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절대적이지 못하며, 모순적인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삶은 행복하면서도 절망스러울 수 있고, 풍요로우면서도 비참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삶의 가치는 모순적이다. 우리 모두는 삶의 모순을 어렴풋이 알고 포용하며 살아간다. 다만, 카뮈의 견해처럼, 더 좋은 삶의 방향은 모순을 직접 대면하고 포용하는 게 아닐까?
08.01 화 ( p.212 ~ p.255 )
나와 세상, 둘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격을 인지할수록, 부조리에 가득한 삶을 견디고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생긴다. 모순에 대한 반항은 고통과 함께, 고통을 버티는 힘을 준다.
시지프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는 가파른 언덕 위로 무거운 돌을 밀어올린다. 언덕 꼭대기에 놓인 돌은 다시 굴러떨어지고, 시지프는 다시 무거운 돌을 밀어올린다. 끝 없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간다. 그는 반복되는 고통으로 슬퍼할까? 혹은,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의식으로 행복할까?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삶과 고통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수용하며, 더 나아가 묵묵히 버텨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