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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능력주의

기간
2024/05/17 → 2024/06/09
분류
사회과학
한 줄 요약
능력주의는 정당하다는 착각. 우리는 노력의 불공정에는 분노하면서 기회의 불공정에는 가만히 있는다.
저자 및 출판사
박권일 / 이데아
평가
⭐️⭐️⭐️⭐️

05.17 금 ( ~ 18 )

3루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기가 3루타를 치는 줄 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불평등에는 무관심하지만, 불공정에는 참지 못한다. 이 기저에는 능력주의가 놓여 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능력에 걸맞게 보상을 받아야 하며, 누군가가 능력에 무관하게 보상을 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심한 박탈감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불공정에 대한 분노는 불평등을 당연시하게 만든다. 우리의 능력은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이 환경은 온전히 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났는데 우리 부모님이 부유하다면, 다른 사람보다 매우 앞선 스타트 라인에 서있게 된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을 고려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능력’ 탓으로 여기는 게 과연 옳은가? 그저 좋은 환경에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너무 잔인한 게 아닐까?
나도 능력에 따라 걸맞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 능력이 온전히 나에 의해서 결정된 것인지, 그저 운이 좋아서인지, 누군가의 도움이 정말 없었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평등을 당연시 하게 된다.

05.20 월 ( 18 ~ 33 )

능력주의가 사회의 철칙으로 맹신되고 있기에 그것은 '혐오 놀이'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기도 했다.
능력의 보상을 향한 집착은 혐오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명분을 만든다. 우리는 자신보다 능력이 좋지 않지만, 더 많은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죄인으로 여긴다.
이 재판은 온전히 편파적인 재판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상대방이 나보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학력이나 경력만으로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을 모두 알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설령 상대방이 능력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이는 그 사람 때문이 아니아 능력을 싹 튀울 수 있는 환경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만큼 많은 양의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단편적인 정보만을 수집하고, 더 깊은 생각을 멈추는 것은 너무도 편하다. 생각을 하지 않을수록, 혐오감을 갖기 쉬워진다.

05.21 화 ( 33 ~ 52 )

오늘날 사회 진화론은 일반적으로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명시되지는 않지만, 능력자가 무능력자• 저능력자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능력주의 논리와 결합해 현실 설명 원리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사회진화론의 등장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강대국은 자신들의 사회가 진화했으며, 그렇기에 퇴보됐다고 생각한 약소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관여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약소국도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며, 강대국을 향한 반발과 동시에 부러움을 가졌다. 약자는 강자의 횡포를 보며며,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05.22 수 ( 52 ~ 64 )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입신출세의 욕망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해야 한다.
능력주의가 강하게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인정과 보상에 대한 욕망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갖는 욕망에서 발현됐기에, 능력주의는 사회적 힘을 얻게 된다.

05.24 금 ( 64 ~ 83 )

서구 열강 처럼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선 그들의 지식을 빠르게 학습할 인재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약소국은 강해지기 위해 강대국의 모든 것을 습득하려고 한다. 즉, 약소국에서 공부는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다만 시간이 흘러 본연의 목적은 훼손된다. 외부의 탄압을 이겨내자는 생각은 사라지고, 내부에서 서열을 만들어 버린다. 같은 구성원일지라도 학력을 기준으로 암묵적 서열이 매겨진다.
인간은 집단을 만들기 좋아하며, 자신의 집단이 훨씬 우수하길 바란다. 우수하다고 생각하기 위해선, 자집단이 성장하는 방법보다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을 만드는 게 훨씬 편하다. 결과적으로 학력주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05.27 월 ( 83 ~ 123 )

역설적이게도, 공정성과 정의에 민감할수록 시험주의는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입 평가의 수단 중에서 시험은 언제나 사회적 논쟁거리더. 시험을 반대하는 분들은 환경이 뒷받침 되는 사람들에게만 훨씬 유리하며, 숫자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타당하지만, 결국 시험이란 수단으로 귀결된다. 이는 시험이 올바른 방식이라서가 아니라, 시험이 가장 공정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경제적 지원이나 교육적 지리에 의한 이점을 가진 집단에게 시험은 공정하게 느껴진다. 앞선 스타트 라인에 섰기 때문에 굳이 시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로 열악한 환경에 놓인 집단도 시험을 공정하게 느낀다. 이들은 이미 타 집단보다 뒤쳐졌음을 인지하며, 그나마 자신의 노력과 인내를 통해 기회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가능성을 면밀히 분석한 이성적 믿음 보다, 이렇게라도 의존하고 싶은 신앙적 믿음에 가깝다.
가진 자는 자신의 기회를 더 견고히 다지기 위해서, 가지지 못한 자는 이것 밖에 없기에 시험이란 제도에 동의했다. 사실상, 현대 사회가 지닌 시험이란 기형적 모습은 모든 집단의 암묵적 동의로 인한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05.28 화 ( 123 ~ 160 )

문제 해결이 가장 절실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수이지만, 노동시장 최약자이기 때문에 개인의 생존만으로도 버겁다. 이들이 용기를 내 부당함을 호소하기라도 하면 반응은 한결 같다. “억울하면 정규직 되든가!” 능력이 없어 비정규직이 됐으니 그먄큼 불이익도 감내하라는 것이다. 한편 기업, 정부, 정규딕 노조도 선뜻 나설 이유가 적다. 노사 갈등을 회파하면서도 구조조정을 추진하려는 기업 및 정부와, 구조조정으로 인한 내부자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정규직 노조는 외부로의 비용 전가에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외부’는 비정규직과 미취업자들이다.
인간은 집단을 분류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설령, 이 과정에서 다른 집단이 피해를 입을지라도, ‘나’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얻기에 옳은 행동이라고 본다. 비정규직 집단에 의해서 기업 집단은 비용 절감을, 정규직 집단은 비용 전가라는 이득을 볼 수 있다. 즉, 비정규직 집단의 존재만으로 이익을 보기에, 이들을 옹호하지 않는다.

05.29 수 ( 160 ~ 218 )

그런 사회는 기회구조를 보정하는 대신 소수의 성공신화로 다수의 비참을 덧칠함으로써 불공정과 부정의를 공정과 정의로 착각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의한 구조 자체를 의심하디보다는 타인이 공정한 룰을 어겼는지 여부에만 촉각을 곤두세운다.
기회가 균등하지 않은 상태에서 노력과 결과만을 비교하며 불공정을 말하는 것은 잘못됐다. 가령, 가정의 경제적 지원이 없는 사람은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만큼 공부할 시간이 줄어든다. 하지만, 능력주의 세상에서 공부에 시간을 쏟지 않았냐며, 오히려 이들을 노력 부족으로 질타한다.
우리 사회는 노력의 불공정에는 분노하면서 기회의 불공정에는 가만히 있는다. 애초에 기회의 불공정은 사회 약소층에서 주로 나타나기에 대중의 관심을 받기 어렵더. 더군다나 기득권층에게는 유리한 지대를 형성해주기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05.31 금 ( 218 ~ 222 )

능력주의를 내면화한 대중은 지배 집단의 능력주의 선동에 일방적으로 세뇌당하거나 속아 넘어간 게 아니다. 대중은 주체적으로 능력주의를 받아들였고 스스로가 능력주의의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 또 가해자가 됐다.
능력주의 세상에서 절대적인 피해자는 없다. 누구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고 동시에 수혜자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피해를 받기 전까지 능력주의에 반발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 전까지 자신이 얻는 수혜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인간을 이타적인 존재라고 하지만, 우리의 이타심은 자신에게 가까운 관계에만 유효하다. 관계성이 적을수록 이타적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식은 멀어질 수 밖에없다. 내가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이 받는 수혜를 포기할 수 있는가?

06.03 월 ( 222 ~ 271 )

중상위층의 지위재생산이 쉽지 않아진 현실에 대한 인식은 이들 이 기회불평등이 악화됐다고 인식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논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계층 이동성은 과대평가 됐다는 분석이 있다고 말한다. 환경과 무관하게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계층을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사회적 인식보다 많다는 셈이다. 계층 사다리에 의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중상위층 집단이며, 이들의 목소리가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 ‘기회의 불평등’이란 사회적 인식이 생겼다는 게 논문 저자의 분석이다.
해당 논문은 기회의 불평등을 상류층과 하류층, 모두가 느끼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각 집단이 불평등을 느끼는 시점은 다르다. 상류층은 현재보다 낮은 보상을 받을 때, 하류층은 현재보다 높은 보상을 받지 못할 때 불평등을 느낀다. 결국 각자의 입장은 너무도 다르다.

06.05 수 ( 271 ~ 320 )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화하지 않으면 능력주의의 문제도 적절히 문제화할 수 없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와 밀접하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각자가 지닌 재산의 규모가 다르며, 이는 기회의 차이로 이어진다. 즉, 재산의 규모는 더 좋은 환경을 쌓을 수 있는 자원의 규모다. 환경이 좋을수록, 능력을 만들 환경도 좋아진다.
이렇게 쌓은 능력은 재산의 차이에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한다. “능력이 좋기에 돈을 이만큼 벌었다”라는 문장 뒤에는 그 능력을 발아한 환경과 기회가 남들보다 좋았다는 말이 숨겨져 있다. 결국 능력주의와 자본주의는 서로를 강화시키며, 결과적으러 능력주의 문제는 체제의 문제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