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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기간
2020/11/09 → 2020/11/22
분류
문학
한 줄 요약
제 아무리 외롭고 쓸쓸할지라도, '나'를 믿고 나아가자
저자 및 출판사
J.D.샐린저 / 민음사
평가
⭐️
위선은 내 눈이 아닌, 타인의 눈에서만 담긴다.
작중에 '나'를 둘러 싼 모든 세계는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전에 다녔던 학교와 전학 온 팬시 고등학교, 어떤 곳이든 선생님과 친구들이 위선적 행동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상대방의 외형이나 신분 등을 바라보며 미묘하게 차별적으로 대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보다 약하다고 판단된 상대에게 부탁이라고 포장한 강압을 행사한다. '나'는 학교에서 보이는 위선에 못 이겨 도망쳤지만, 도망쳐 나온 사회에서도 위선은 만연하다. 술집이나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이전에 알고 있는 지인들까지. 마치, 삶에서 위선은 필수 소양처럼 보인다.
위선자는 자신의 행동이 위선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위선적 행동은 그들에게 그저, 하나의 행동일 뿐이다. 마치, 숨을 쉬거나 걸을 때 이를 인지하지 않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위선적 행동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선, 그 행동 자체를 판단 해야만 한다. 그리고, 판단은 대상의 인지적 존재를 전제로 한다. 애초에 대상 자체를 인지할 수 없다면, 판단할 수 조차 없다. 그리고, 위선자에게 '위선적 행동'이란 것은 인식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인식 속에서 '위선적 행동'은 다른 '행동'과 동일하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타인의 눈에서만 이들의 행동에 숨겨진 위선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위선은 내 눈이 아닌, 타인의 눈에서만 담긴다.
도덕적 옳음은 좋은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작중의 세계에서 오직 '나'와 여동생 피비와 같은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 모두가 위선을 부린다. 위선적 행동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지만, 살아가기 위해 위선이 필수적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위선을 부리지 못하는 자는 위선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는 자 앞에서 약자가 될 뿐이다. 즉, 도덕적 옳음을 선택한다면,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점은 지금까지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어 온 명제에 질문을 던진다. 권선징악이란 사자성어와 같이, 우리는 옳은 행동을 해야지 그에 걸맞는 보상을 받으며, 옳지 못한 행동을 한다면 고통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호밀 밭의 파수꾼>에서 보여준 사회의 단면은 앞선 믿음을 깨트린다. 사회가 옳다고 말하는, 도덕성을 따르는 사람은 오히려 사회적 약자로 전략하게 된다. 옳은 행동을 한 자(=위선을 쫓지 않는 자)는 고통 받고, 옳지 못한 행동을 한 자(=위선을 행하는 자)는 언제나 이득을 본다. 이런 모순적 상황이 지속된다면, 도덕적 인간은 어떠한 행동을 보이는가? 주로 택하는 행동은 자신도 위선을 추구하거나 혹은, 위선적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위선적 세계로부터의 도망은 선택할 수 없는 답이다.
작중의 '나'는 위선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대신에, 위선적 세계로부터 도망치기를 선택했다. '나'는 팬시 고등학교에서 뉴욕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뉴욕에서 다시 직면한 위선에 놀라며, 사람이 별로 없는 서부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나'에게 위선적 세상은 너무도 거대했고, 거대한 존재에 맞서 싸우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 앞에서 개인은 너무도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도망은 궁극적 답이 아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택 자체를 할 수 없다. 개인을 둘러 싼 세상은 매우 거대하다.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과연 도망치는 게 가능할까? 어디를 가든 위선은 존재한다. '나'는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면 그 누구도 자신과 대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과연 그럴까? 위선자에게 일반적인 사람보다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더 손 쉬운 상대로 보일 것이다. 즉, 위선적 세계로부터의 도망은 애초에 선택할 수 없는 답이다. 어디를 가든 위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어디서도 아늑하고 평화로운 장소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런 곳은 없는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 일단 가보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틈을 타서 어떤 자식이 바로 코밑에다 <이런, 씹할> 이라고 써놓고는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묵묵하게 살아가다.
결과적으로 '나'는 여동생인 '피비'를 보며, 위선적 세계에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는 위선과 타협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즉, '나'는 위선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위선적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 그대로 묵묵히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신의 주변에 위선이 있든 없든지 간에, '나'는 위선으로부터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하리라 결심한다. 마치, 순수한 어린 아이들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는 호밀 밭의 파수꾼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호밀 밭의 파수꾼일지도 모른다.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소양대로 살아가는 삶. 그리고, 위선으로부터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하는 삶. 작가가 책의 제목을 <호밀 밭의 파수꾼>으로 정한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 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졀벅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군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